[서울=RNX뉴스] 곽태영 기자 = 작가 김영중은 1926년 전남 장성출신으로 1948년 서울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하였으나 한국전쟁기에 학업이 중단된 이후 홍익대학교에 편입하여 김환기, 윤효중에게 사사했다.

일본을 통해 고전적인 인체조소 방법을 배웠던 한국 1세대 조소조각가들처럼 김영중의 초기 작품은 이들에게서 배운 충실한 구상 인체 소조작품에서 출발했다.

초창기 그의 작품에는 전쟁으로 인한 전후의 인간상과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자 성찰하는 모습 등이 드러나 있다. 이후에도 그는 <장갑 낀 여인>(1958)과 <평화 행진곡>(1961)처럼 여체를 변형하고 단순화하기도 하며, 지속해서 인체조각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만의 독창적인 조형세계를 구축했는데 이는 학습기에 열중했던 인체에 관한 관심의 결과로 여겨진다.

김영중의 주목할 만한 미술활동 중 하나는 원형회 활동이다.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 출신의 실험성이 강한 젊은 조각가들이 1963년 결성한 원형회는 ‘공간과 재질의 새 질서와 조형윤리’라는 강령을 내걸었던 전위적 조형그룹이었다.

이들은 유독 용접조각을 통해 현대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한국전쟁을 치른 지 10년이 지났지만 전쟁의 아물지 않은 상처와 폐허를 극복하기에 너무 가난했던 시절, 계속된 사회 혼란과 정치부패 그리고 부조리한 현실 경험 속에서 물질성을 강조한 용접조각이 작품소재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김영중은 사회의 구조 안에 얽매인 순수 생명력을 조각 작품으로 보여주었다.

수직 구도로 앙상한 뼈대만 남아 곧 공기 중에 증발해버릴 것 같은 <해바라기 가족>(1963) 등의 형상은 <흙․흙>(1976), <싹>(1986) 등에서 마치 사라지는 연기의 순간의 모습과 같은 추상 조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김영중은 불교 신자로서 항상 불교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고 전한다.

이런 전통문화와 불교에 대한 그의 관심이 연기 형상과 같은 추상 조형 작품을 제작하게 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대표적 공공미술인 세종문화회관의 석부조 <비천상>(1977) 등의 제작으로 이어졌던 것 같다.

주로 사찰의 범종에서 허공을 날며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면서 부처님의 공양과 찬탄을 하는 비천상을 그는 건물 외부에 부조로 제작했다.

김영중은 다수의 공공미술 작품을 제작했다. 1962년 서울 마포아파트의 <평화행진곡> 분수 조각을 시작으로 한 그의 공공미술 작품은 초상조각, 환경조각, 기념상징 조형물 등 200여점으로 추정된다.

그의 대표적 공공미술 작품은 <강감찬 장군 기마동상>(1971), 세종문화회관의 건물 외관의 석부조상인 <비천상>(1977), 독립기념관의 <불굴의 한국인상>(1986), 광주비엔날레 상징조형물인 <경계를 넘어서>(1995) 등이 있다. 광주에서도 <경계를 넘어서>를 비롯해서 광주문화예술회관의 <예술+행위+도약>(1992), 광주고속버스터미널 광장의 <고향>(1992), 광주 연진미술원의 <의재 허백련 초상초각>(1980) 등 그가 제작했던 공공미술 작품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1960년대 이후 제작된 그의 순수 작품과 공공미술 작품에는 인물들이 서로 기대고 있거나 부둥켜안고 있는 가족 또는 모자상의 형상이 즐겨 표현되었다. 이들은 하나의 신체와 영혼으로 단단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었다.

부둥켜안거나 얽히고설켜 친밀하게 밀착된 가족의 형상은 공공미술로도 즐겨 제작되었다. 1960년대와 그 이후 한국사회는 개인보다 민족과 구성원으로서의 집단의식이 중요시되었던 시대였다.

그는 가족상과 모자상 등을 통해 당시 국가와 사회가 요구했던 공동체의 삶의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김영중은 곡선과 면을 서로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세계를 만들어냈다. 그의 조각 작품에선 인지하는 범위 내에서 사람의 형상이 단순화되고 변형되었다.

형상의 단순화는 <평화행진곡>(1961)과 함께 <평화>(1961, 중앙정보부 공공미술)와 <평화건설>(1962, 미국대사관 공공미술), <농촌의 여가>(1969) 등 부조 작품에서 표현되었다.

부조로 표현된 단순화된 인체 표현은 이후 더욱 과감한 생략과 단순화로 환면의 입체작품으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곡선과 면을 서로 어우러지게 한 단순화된 인체 표현은 그만의 독특한 양식적 특징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영중은 수직으로 상승하는 역동적 형상을 즐겨 제작했다. 우주 전체의 생성원리와 의의를 그린 ‘천명도’에는 천(天)은 ‘□’, 지(地)는 ‘◌’ 그리고 인(人)은 ‘△’으로 표현되었는데 그는 이러한 사상에 심취하여 조형 작품이란 하늘과 땅의 중간에 인간에 의하여 작위적인 형상을 창조하여 세우는 것이라고 해석하여 삼각 구도의 조형 작품을 즐겨 표현했다.

이러한 자신의 세계관에서 비롯된 단순화된 인체형상과 수직 상승의 비상하는 삼각 구도는 그의 공공미술 작품에서도 사용되어 국민의 자발적 동의를 끌어내기 위한 형상으로서 당시 사회가 요구했던 이미지의 역할을 했다. (사진:광주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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