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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싶은 길] 바다 뒤 호수에서 바람을 가르다

[걷고 싶은 길] 바다 뒤 호수에서 바람을 가르다

  • 한미희 기자
  • 승인 2019.06.13 09: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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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 화진포 둘레길

(고성=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어린 시절, 여름 여행의 0순위는 강원도였다. 해외여행이 흔해진 요즘은 실제 순위가 달라지긴 했지만, 어쨌든 추억 속 여름 여행은 여전히 강원도다.

올해는 실제 그러고 싶은 이유가 더해졌다. 4월 초, 성난 봄바람을 타고 번진 불에 까맣게 타버린 땅에서 사람의 가슴까지 재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태러 오랜만에 다시 동쪽 바다로 향했다.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왜 이제야 왔을까 싶은 풍경이었다.

김일성 별장에서 내려다본 화진포 풍경 [사진/전수영 기자]
김일성 별장에서 내려다본 화진포 풍경 [사진/전수영 기자]

서울양양고속도로를 달려 동해고속도로로 갈아타고 북쪽으로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한껏 물이 오른 신록에 마음도 같이 들떴다. 하지만 속초IC를 나와 국도로 들어서자마자 새까맣게 타버린 산과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도로 바로 옆까지 밀고 들어온 화마의 흔적은 여전히 짙었다. 들떴던 마음이 내려앉아 잠시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는 여전히 눈부셨다.

◇ 바다, 해변, 솔숲, 호수가 그리는 파노라마

7번 국도를 따라 북으로 달리면 국내에서 가장 큰 석호(潟湖)인 화진포에 닿는다. 바다와 해변과 솔숲과 호수가 다시 하늘로 이어지는 절경이 기다린다. 사진에도 제대로 담기지 않는 이 절경을 대변하는 건 남북 최고 권력자들의 별장이 이곳에 모여 있다는 사실이다.

해방 후 38선이 그어져 북쪽 땅이었을 땐 김일성 일가가 여름 휴양지로 '화진포의 성'을 찾았고, 한국전쟁 이후 남쪽이 수복했을 땐 초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과 자유당의 이인자 이기붕 가족의 별장도 지척에 있다.

화진포 해변과 소나무숲이 이어지는 산기슭에 올라앉아 있는 '화진포의 성'은 그중에서도 최고의 전망을 자랑한다.

원통형의 석조 건물인 이 성은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의 결핵 치료를 위해 크리스마스실을 처음 만든 캐나다 선교 의사 셔우드 홀이 독일에서 망명해 온 건축가에게 설계를 부탁해 지은 선교사들의 예배당이자 휴양지였다.

2층 창가에 서면 투명한 초록빛 바다와 푸른 소나무,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모래 해변이 창틀을 액자 삼은 한폭의 그림이 된다.

옥상 전망대로 올라가면 초록빛 바다와 푸른 소나무,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모래 해변 뒤로 짙푸른 솔숲을 지나 다시 파란 호수가 파노라마로 이어진다.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는 화진포의 성 [사진/전수영 기자]
'김일성 별장'으로 불리는 화진포의 성 [사진/전수영 기자]

성은 해방 후 북한 공산당의 귀빈 휴양소로 사용됐는데 김일성과 부인 김정숙, 아들 김정일과 딸 김경희 등 일가족이 이곳에서 묵으면서 '김일성 별장'으로 불렸다 한다.

1948년 당시 어린 김정일이 소련군의 아들 등과 함께 성을 배경으로 돌계단에 앉아 찍은 사진이 바로 그 돌계단 옆에 전시돼 있다. 전쟁 중 훼손된 것을 1964년 재건축했고 육군의 장병휴양시설로 이용되다 1999년부터 전시관으로 개방했다.

이기붕 부통령 별장은 김일성 별장이 있는 언덕 아래 솔숲의 단층 건물로, 화진포를 향해 자리 잡고 있다.

이 건물 역시 1920년대 외국인 선교사들의 사택으로 지어져 이후 북한 공산당 간부의 휴양소로 사용되다가 자유당 정권의 실세였던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가 개인별장으로 썼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이기붕은 3·15 부정선거로 부통령에 당선됐다가 4·19 혁명으로 사임한 인물이다. 미국으로 도주하려 했지만, 이승만에게 양자로 보낸 큰아들 이강석이 부모와 동생까지 모두 총으로 쏘고 본인도 자살하면서 일가족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화진포의 성과 이기붕 별장, 화진포 남호과 북호 사이에 있는 이승만 별장은 역사안보전시관으로 꾸며져 공개되고 있다. 통합 입장권(3천원)을 사면 역사안보전시관 세 곳과 생태박물관까지 모두 둘러볼 수 있다.

자전거로 달리기 좋은 화진포 둘레길 [사진/전수영 기자]
자전거로 달리기 좋은 화진포 둘레길 [사진/전수영 기자]

◇ 호반을 달리다

석호는 해수면 상승으로 해안이 침수되면서 만이 생기고 그 입구가 모래톱으로 막혀 형성된다. 민물과 바닷물이 뒤섞이며 독특한 자연환경을 만들어 생태적으로도 보존 가치가 높다.

화진포는 8자 모양으로 남호와 북호로 나뉘고, 좀 더 작은 북호에서 화진포 해수욕장을 거쳐 바다로 이어지는 물길이 나 있다.

화진포 동서남북으로 네 곳에 습지를 조성해 호수로 유입되는 오염 물질을 정화한다. 습지마다 산책로와 조류관찰대 등이 있어 생태교육장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겨울이면 갈대밭으로 고니와 청둥오리 등 철새가 날아와 장관을 이루고, 여름이면 해당화가 만발한다.

호수 둘레가 16㎞에 달해 가볍게 걷기에는 꽤 길고 대부분 평지여서 심심한 편이다. 멋들어진 소나무 숲을 잠시 지나기도 하지만 그늘도 거의 없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에 훨씬 좋다. 길이 잘 정비돼 있고 곳곳에 자전거 거치대와 쉼터, 화장실도 있다. 화진포 해수욕장 끝에 있는 해양박물관 옆 자전거 대여소에서 신분증을 맡기면 헬멧까지 무료로 빌려주니 금상첨화다.

아침 일찍 도착해 화진포 해수욕장에서 눈부신 아침 햇살에 일광욕을 즐기며 어슬렁거리다 오전 9시 대여소가 문을 열자마자 1등으로 자전거를 골랐다. 해양박물관을 끼고 나와 북쪽으로 올라가다 대진중고등학교 앞에서 왼쪽으로 난 둘레길로 들어간다.

죽정습지 [사진/전수영 기자]
죽정습지 [사진/전수영 기자]

봄바람을 가르며 쌩쌩 달리다가도, 속도를 늦추고 아주 천천히 발을 구르며 봄 내음을 들이마셨다. 그마저도 관두고 아예 멈춰서야 할 때가 많다.

습지마다 조성된 주변 산책로와 조류관찰대, 그 사이를 유영하다 낯선 기척에 놀라 날아오르는 새들, 한 해 농사를 위해 갈아엎기 시작한 밭에서 퍼져 나오는 땅의 기운, 수려한 소나무숲의 청량한 공기, 갈대숲 뒤로 봄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의 잔물결이 번갈아 걸음을 잡아 세운다.

호수에 바짝 붙은 데크의 나무 그늘에 자전거를 세우고 물결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봄날의 오후를 만끽했다.

남호의 남단을 돌아 금강 습지를 지나면 마지막 스퍼트를 낼 차례다. 국토 종주 동해안 자전거길이 시원스럽게 뻗어있다. 종주를 즐기는 진짜 라이더들과 괜한 경쟁을 할 필요도 없다.

왼쪽으로는 호수와 해당화가, 오른쪽으로는 바다와 소나무가 경쟁하듯 유혹하니 다시 속도를 줄이거나 멈춰서야 할 수도 있다. 결국 45분으로 안내된 둘레길 코스는 2시간 30분짜리가 됐다.

자전거를 반납하고 간단히 허기를 채우면, 화진포 동쪽 해안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소나무숲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해발 122m인 응봉까지 산림테라피원, 관목원, 습지원, 명상숲길 등 다양한 테마로 꾸민 산림욕장이 이어진다.

응봉에서는 남호와 북호, 화진포 해수욕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소나무숲길을 따라 거진항까지 트레킹을 이어갈 수도 있다.

자전거로 달리기 좋은 화진포 둘레길 [사진/전수영 기자]
자전거로 달리기 좋은 화진포 둘레길 [사진/전수영 기자]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9년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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