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보라매병원 응급센터, 매일 밤 주취자와 '씨름'…다른 대형병원도 비슷
"무조건 대형병원行 바꾸고, 위급상황 아니면 전화로 대기시간 확인해야"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죽는다고 여관에서 연탄을 피웠답니다. 술 취한 상태고요."

지난달 30일 저녁 8시 30분 서울대학교병원이 운영하는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서울특별시보라매병원(보라매병원) 응급의료센터에 구급차 한 대가 도착했다. 구급차에 실려 온 환자는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이모(45) 씨였다.

구급대원은 '이씨가 여관에서 연탄을 피워 죽으려 한다고 신고했고 여관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다'며 다급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다. 이씨가 들어오자 응급센터 의료진은 이씨를 중증환자 전용 침대에 눕히고 의식을 확인했다.

다행히 의식이 있었다. 이씨는 우울증을 앓고 있으며 괴로워서 술을 마시고 죽으려 했다고 털어놨다.

의료진은 이씨가 위급한 상태는 아니라고 판단해 일단 이씨의 체내 일산화탄소 농도를 체크했다. 검사 결과 일산화탄소 농도는 정상이었다.

담당 간호사가 이씨에게 보호자 전화번호를 물었고, 이날 저녁 응급센터 내 중증환자 구역 수간호사인 문명화 책임간호사가 그의 부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이씨의 부친은 "걔는 술만 마시면 항상 죽는다고 해요. 술 깨면 그냥 보내세요"라며 보호자 동행을 거부했다.

문 책임간호사는 "연탄가스 중독 증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정신이상 모습도 있어서 일단은 중증환자실에서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보라매병원은 주취자 응급의료센터로 서울지방경찰청 협력지정병원이다. 보라매병원 응급센터 중증환자구역은 매일 밤 주취자와 씨름한다.

의료진은 보라매병원 외에도 대부분의 대형병원 응급센터 상황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술 마시고 쓰러진 사람을 지나가던 시민이 발견해 신고하면 일단 응급센터로 오게 된다. 응급센터에서는 환자가 술 때문에 쓰러졌는지, 아니면 술 외에도 뇌출혈이나 다른 이상으로 쓰러진 것은 아닌지 반드시 확인해야 한다.

이런 환자들은 의식이 거의 없어 중증환자로 구분된다. 보라매병원 응급센터에는 총 13개의 중증환자 전용 침대가 있는데 이날 밤에도 이중 한 자리를 이씨가 차지했다.

이휘재 보라매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통상 주취자 중 10% 정도만 실제로 위급한 상태이고 나머지는 그냥 취한 상태"라며 "의식이 없으면 중증환자로 봐야 하는데 그사이 더 급한 환자를 놓칠 수 있어 큰 문제"라고 말했다.

주취자 난동도 문제다. 저혈당으로 의식을 잃었다가 이날 오후 119 구급대의 도움으로 응급센터에 들어온 김모(85)씨가 저녁 7시 30분께 고통을 호소하며 신음을 냈다. 김씨는 치매를 앓고 있어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안 됐다.

그때 김씨 맞은편에 누워 있던 최모(33)씨가 시끄럽다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최씨는 발을 구르고 링거 바늘이 꽂혀있는 팔을 흔들며 자신의 침대를 내리쳤다.

최씨의 난동에 보안요원이 급히 출동했다. 보안요원은 최씨의 난동이 계속되자 붕대로 침대에 그의 손과 발을 결박했다.

최씨는 이날 오후 2시께 보라매공원에서 쓰러져 있다가 시민 신고로 응급센터에 들어온 환자다. 술을 많이 마신 상태였는데 외상이 있었고 정신이상 증상도 있었다. 경찰을 통해 확인한 결과 중국교포였고 연락할 보호자도 없었다.

최씨는 응급센터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이 돌아오자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의료진은 검사를 위해 당시 일단 안정제를 놓았는데 안정제와 술기운이 깨자 다시 난동을 시작한 것이다.

결국 최씨는 손발이 묶인 채 격리실로 보내졌다. 격리실은 난동을 부리는 환자를 위한 1인 공간이다. 모니터로 환자 상황을 실시간 확인할 수 있다.

문 책임간호사는 "최씨는 외상이 있어 컴퓨터단층촬영(CT)까지 해 검사 결과를 확인해야 한다"며 "다른 환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아직 내보낼 상황도 아니어서 격리실로 보냈다"고 설명했다.

이날 밤 10시께 응급센터 환자 수용 상황을 보여주는 모니터 속 반달 모양 표가 빨간색으로 가득 찼다. 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응급실 정원이 만원이라는 뜻이다.

다행히 30분 만에 응급실 환자 수가 40명대로 떨어졌다. 김하영 전공의는 "오늘은 그래도 환자가 많지 않은 수준"이라며 "바쁠 때는 60명이 넘을 때도 있다"고 했다.

응급센터 중증환자실이 주취자들과 싸움이라면 일반 환자 구역은 밀려드는 환자를 소화하느라 정신이 없다.

환자가 처음 응급센터에 들어오면 예진 구역에서 초기 평가를 받는다. 병원은 환자들을 크게 일반 환자와 경증환자, 중증환자, 외상환자, 소아 환자로 구분한다. 통상 중증환자는 그대로 두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는 환자이고 경증환자는 누워 있어야 하는 환자, 일반 환자는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환자다.

일반 환자가 기다리는 의자 28개는 이날 저녁 8시가 지날 때부터 환자와 보호자로 가득 찼다. 응급센터에는 환자 1명당 보호자 1명이 동행할 수 있다. 일반 환자들은 저마다 링거를 맞거나 응급조치를 받은 상태에서 앉아서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

밤 10시 30분께, 손가락이 3분의 1가량 절단된 50대 A씨가 의료진에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냐고 항의했다. A씨는 병원에 도착해 응급조치만 받고 2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병원은 인근 병원 응급실에 자리가 있는 것을 확인한 뒤 A씨에게 해당 병원으로 옮기는 게 어떠냐고 물었고 결국 A씨는 병원을 떠났다.

아파트에서 놀다가 왼손이 부러진 B(13)군도 이날 저녁 7시께 병원에 왔다. B군은 엑스레이 촬영만 하고 약 2시간 반을 기다린 뒤에야 깁스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뒤에도 뼈가 제대로 맞춰졌는지 엑스레이 촬영을 한 번 더 했고 결과를 기다렸다가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야 귀가할 수 있었다.

김하영 전공의는 "피부가 찢어져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으면 놀라서 일단 큰 병원 응급센터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대형병원 응급센터는 보통 2∼3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며 "이런 정도는 동네 종합병원 응급센터가 빠를 수 있으니 전화로 확인하고 환자가 적은 곳으로 가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이휘재 교수도 "아프면 응급실에 와야 하지만 단순히 힘들고 불편해서 오는 건 지양해야 한다"며 "외국에서는 인터넷을 찾아 본인이 자가진단을 하고 119를 통해 병원에 와야 할 정도인지 체크하는데 우리나라도 그런 문화가 정착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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