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제강 기념관과 F1963

(부산=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 철강 기업의 기념관이라고 해서 지레 딱딱하고 지루할 것이라는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하나의 근간을 이루는 산업의 역사와 일상생활에 숨어 있는 산업 기술은 제법 흥미롭고, 기업의 정체성은 건축이라는 예술 안에 요란하지 않게 담았다. 기업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채 새로 태어난 문화공간도 매력적이다.

아파트와 주택, 작은 공장과 창고, 대형 마트가 어우러져 있는 부산시 수영구 망미동. 수영강이 바라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을 오른다. 겉으로 봐서는 정확히 몇 층인지도 알 수 없는 콘크리트 건물이 나타난다.

제법 큰 이 건물은 언덕 위에 위압적으로 올라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언덕에 슬며시 묻혀 있다. 부산 토종 특수선재 기업인 고려제강의 홍보관과 뮤지엄, 연수원이 들어선 키스와이어 센터(Kiswire Senter)다.

2013년 건축가 조병수가 설계해 이듬해 '부산다운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건축학도들의 견학 코스가 됐다.

지형을 거스르지 않고 들어앉은 건물의 자태뿐 아니라 건물 안팎에서 은근하게 드러내는 기업의 정체성이 건축 문외한의 눈에도 거부감 없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 와이어가 지탱하는 건물

기둥과 보가 없는 건물을 지탱하는 것은 강철선을 꼬아 만든 와이어로프다. 건물 외부의 땅속 깊이 박힌 기둥(록 앵커·rock anchor)과 외벽 상단으로 이어진 28개 와이어로프의 장력은 1만2천509명이 당기는 힘과 같다.

지붕의 무게 역시 천장을 가로지르게 설치된 와이어로프가 지지한다. 건물을 지지하는 데 사용된 와이어로프는 1천919.1m에 달하고, 실제 건물 무게의 3배 이상을 지탱할 수 있다고 한다.

와이어는 기능적으로뿐만 아니라 계단 난간에도, 야외 공연장의 무대 스크린 등에도 쓰였다. 차갑고 무거운 강철이 가늘고 유연한 선이 되어 공간을 가르고 연결하며 섬세한 느낌을 더했다.

키스와이어 센터는 물과 돌이 있고, 바람이 도는 중정(中庭)을 사이에 두고 한쪽은 연수원으로 사용하고, 반대쪽 1, 2층에 홍보관과 뮤지엄을 두고 있다.

1층 홍보관 로비는 광안대교를 비롯해 고려제강의 와이어 제품이 사용된 60개 다리의 모형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차를 타고 지나가거나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다리에 사용된 메인 케이블의 단면도 확인할 수 있다. 광안대교에 사용된 이 메인 케이블은 5.1㎜ 와이어 312개를 엮어 만든 가닥(strand) 27개를 압축한 것으로, 지름이 60㎝에 달한다.

반대로 반도체 절단에 쓰이는 와이어의 굵기는 0.03㎜에 불과하고, 주사기 안에 들어가는 더 가느다란 와이어도 있다.

침대 매트리스 안의 스프링은 누구나 상상하기 쉽지만, 자동차 안에는 상상한 것 이상의 와이어가 구석구석에서 다양하게 쓰이고 있었다.

◇ 공간을 만들고 채우고 연결하는 와이어

2층 와이어 뮤지엄은 '와이어가 만든 건축'이라는 건물의 정체성을 더욱 감각적이고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기둥과 보가 없어 더욱 넓어진 건물의 공간 한가운데는 달팽이 껍데기처럼 와선형으로 된 경사로(ramp)가 설치돼 있다. 철판으로 된 경사로는 3층 야외 정원으로 이어진다.

이 경사로를 지탱하는 것 역시 건물 안과 밖으로 연결된 와이어로프다. 출렁다리처럼 흔들리지 않을까 싶었지만 따라 올라가 보니 생각보다 안정적이다.

이곳에서는 와이어의 역사와 쓰임새에 대한 정보도 다양한 방식으로 흥미롭게 보여준다.

경사로 가운데 공간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다. 피아노의 88개 건반을 두드려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음악은 230개 내외의 강철로 된 현이 진동해 내는 소리다.

벽 한쪽에는 선으로 만든 자동차 조형물과 벽에 설치된 화면에서 나오는 영상이 합해져 자동차의 구조와 그 안에 숨겨진 와이어의 역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반대편 벽에서는 어망이나 덫, 옷을 만들기 위해 로프를 처음 사용했던 선사 시대부터 1800년대 와이어로프를 발명해 세계 최초의 와이어 교량인 뉴욕 브루클린 다리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를 애니메이션으로 볼 수 있다. 애니메이션의 그림은 부산대 조소과 학생들의 와이어 작업으로 벽에 걸리기도 했다.

뮤지엄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방문하려면 홈페이지(www.kiswiremuseum.co.kr)를 통해 예약해야 한다. 하루 세 차례 직원의 안내에 따라 한 시간가량 둘러볼 수 있다.

◇ '와이어 공장에서 문화 공장으로'

내부 경사로를 통해 뮤지엄을 나와 고려제강 본사 건물을 지나 내려오면 녹슨 철문 안으로 키가 큰 대나무 숲이 보인다. 10∼20m까지 자라는 맹종죽이다. 강하면서도 유연한 속성이 와이어와 닮은 대나무에 기업의 철학을 담았다 한다.

바닥에는 계절이 무색하게 무성히 자란 토끼풀밭 사이로 옛 공장 건물 바닥이었던 콘크리트 폐기물이 디딤돌로 깔려있다.

숲길을 나오면 하늘색 철망으로 건물 정면을 확장한 'F1963'이 나온다. 고려제강이 이곳에 처음 세운 수영공장 건물이다. F는 Factory(공장)의 첫 글자, 1963은 공장을 지은 해다. 주변이 온통 논밭이었던 그때부터 45년 동안 이 공장에서 와이어로프를 생산했다.

생산 공장들이 시 외곽으로 이전하면서 2008년 이후 창고로 쓰이다가 2016년 부산비엔날레 전시장으로 활용된 이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널찍한 공장 건물의 골조는 그대로 남겨둔 채 중정을 내고 주변을 둘러 미술관과 서점, 카페와 식당, 공연장이나 전시장으로 쓰일 다목적홀과 도서관이 들어섰다.

시원스럽게 트인 중정은 사방의 공간으로 빛과 바람을 보내고, 무대에서 공연이 펼쳐지며, 사람들이 두런두런 모이는 공간이 됐다. 걷어낸 콘크리트와 목재는 장식물로, 벤치로 다시 자리 잡았다.

◇ 또 다른 기념관이 된 카페

F1963에 가장 먼저 입점한 카페 테라로사는 공장의 또 다른 기념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천장의 철골 구조물과 검정-노랑 페인트로 안전 표시가 칠해진 기둥, 울퉁불퉁한 바닥과 철거하고 남아 있는 벽의 흔적은 여전히 공장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하고, 그 시절에 썼던 발전기는 카페에서 들여놓은 대형 로스터기와 함께 박물관의 전시물처럼 보인다.

공장에서 썼던 철판은 대형 바와 테이블로 되살아났고, 와이어를 감아놓는 실패처럼 생긴 다양한 크기의 보빈도 실내장식용품과 테이블이 됐다.

부산 출신으로, 띠를 활용해 공간을 나누는 작업을 해 온 손몽주 작가의 와이어 설치작품이 공간에 상징성과 예술성을 더했다.

서울 소격동에 있는 국제갤러리의 첫 분점도 이곳에 자리 잡았다.

지난해 12월부터 2월 24일까지는 사진작가 구본창의 개인전이 열려 대표작인 '백자' 연작과 '청화백자' 연작 등을 선보였고, 3∼4월에는 국제갤러리 전속 작가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 국내 최대 규모로 들어선 오프라인 중고서점 예스24 역시 문화공간 안의 문화공간이다.

오프셋인쇄기, 활자주조기, 엮음기, 실링 인쇄기 등 쉽게 볼 수 없는 과거의 출판 기계들이 서점 곳곳에 놓여 있고, 민화 전시도 함께 이뤄지고 있었다.

미술, 건축, 사진, 디자인, 음악 등 예술 전문 도서관인 F1963 도서관은 3월 20일까지 시범 운영 기간으로,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8시까지 이용할 수 있다.

양조 시설을 갖춘 체코 펍과 막걸리 레스토랑, 뒤뜰 원예점의 온실과 정원, 폐수처리장에 만든 왕대와 수련 정원, 본사 건물과 이어져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다리까지 구석구석 돌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즐거운 어른들의 놀이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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