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필드 피치 여운형 만나 한인의 비참한 현실 자각
조지 애쉬모어 피치 부부 김구 선생 탈출에 결정적 도움
피치 목사 기려 건립된 훙더탕 교회 상하이 둬룬루 명물

(상하이=연합뉴스) 차대운 특파원 = 중국 현대 문학의 거장 루쉰(魯迅)을 비롯한 유명 문인들이 생전 자주 거닐어 '문화명인(文化名人) 거리'로 꾸며진 상하이시 둬룬루(多倫路).

이 거리 한가운데에는 중국풍과 서양풍이 결합된 독특한 양식의 교회인 훙더탕(鴻德堂)이 우뚝 솟아 있어 지나는 행인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윤봉길 의사의 의거 현장인 루쉰공원(옛 훙커우공원)에서 걸어 10분 거리인 이곳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모습도 이따금 눈에 띄었다.

하지만 훙더탕 교회가 2대에 걸쳐 일제강점기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헌신적으로 도운 미국의 피치 가문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까지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피치 목사 가족과 한국 독립지사들의 인연은 조지 필드 피치 목사가 중국에서 활동하던 191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장로회 목사이던 피치는 1870년대부터 중국 상하이에서 선교 활동에 나섰다.

1910년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 병탄되고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로 속속 망명하면서 피치 목사 가족들은 본격적으로 한인 독립운동가들과 인연을 맺고 교류하기 시작했다.

특히 자신이 운영하던 서점 '협화서국(協和書國)'에서 판매부 주임으로 일했던 몽양 여운형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일제의 지배에 시름 하던 한인들의 현실에 주목하게 된다.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꾸려지자 피치 목사는 본격적으로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돕기 시작했다.

다른 미국인 선교사들과 함께 구호품과 의연금을 모아 한인들을 돕는가 하면, 임시정부가 설립한 한인 학교인 인성학교 기금 모집을 위한 고문으로 활동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지원에 나선 것이다.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이 미국 총영사관에 피치 목사의 한인 지원 활동을 항의하면서 압박을 가하기도 했지만 1923년 2월 상하이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의 한인 지원 활동은 굽힘 없이 이어졌다.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이런 부고 기사가 실렸다.

"우리 한인에 대한 다대한 동정심을 가지고 우리 독립운동에 대하여 비밀리에 또는 공공연하게 막대한 원조를 여하던(주던) 미국인 피치 목사는 신병으로 인하여 지난 17일 상하이 자택에서 별세하였는데 당년이 78세이더라."

피치 목사의 사후인 1928년 미국 장로회는 피치 목사를 기려 상하이에 훙더탕 교회를 세웠다.

그의 사후 아들인 조지 애쉬모어 피치 목사와 부인 제럴딘 피치 여사 역시 한국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1932년 4월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로 배후로 지목된 백범 김구 선생이 일본 군경에 추격당하자 조지 애쉬모어 피치 목사는 망설임 없이 김구 선생을 20여일간 자신의 집에 숨겼다.

일제의 추격 망이 이 집에까지 좁혀오자 조지 애쉬모어 피치 목사는 제럴딘 피치 여사와 함께 김구 선생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다. 김구 선생은 조지 애쉬모어 피치 목사가 운전한 차를 타고 상하이역으로 가 자싱(嘉興)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 "부인은 자기네 자동차에 나와 부부인 양 나란히 앉고 피치 선생은 운전사가 되어 뜰 내에서 차를 몰고 문 밖으로 나갔다"고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이뿐만 아니라 조지 애쉬모어 피치 목사는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불법적인 체포에 항의하면서 공개적인 석방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부인 피치 여사 역시 열정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1942년 3월 뉴욕타임스에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호소하는 기고문을 실어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 내 관심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또 오랜 중국 내 선교 활동을 통해 맺은 국민당 고위 인사들과의 친분을 활용해 장제스(蔣介石)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에게 편지를 보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승인하도록 간곡히 요청하기도 했다.

조지 애쉬모어 피치 부부와 한국의 인연은 광복 이후에도 이어졌다.

1947년 YMCA 총간사로 임명돼 한국을 찾은 조지 애쉬모어 피치 목사 부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까지 전국을 돌며 구호 작업에 앞장섰다.

김주성 국가보훈처 연구원은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많은 외국인들이 있었지만 피치 목사 가족은 2대에 걸쳐 지속해 한국의 독립지사들을 도왔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사례라고 볼 수 있다"며 "피치 목사 가족이야말로 '한국인의 친구'라는 수식어를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물들"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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