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실패 일본인 브로커 농간에 평당 몇 백원 짜리 '바가지'구입도
한때 "일본 수자원 노린다" 소문에 지자체 규제 "조례' 제정 소동

(서울=연합뉴스) 이해영 기자 = "외국 자본이 일본의 물(水)자원을 노리고 있다".

8년전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외국 법인과 개인의 일본 산림 대량 매입 소동의 진상이 밝혀졌다.

아직 수수께끼 같은 부분이 일부 남아 있지만 소동의 배경은 뜻밖에도 중국 부유층이 신분과시용으로 사들인 것 같다는게 이 문제를 심층 취재한 공영방송 NHK가 내린 결론이다.

국가 소유라서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없는 중국계 부유층이 홋카이도의 유명 리조트 인근에 넓은 땅을 갖고 있다는 걸 주위에 자랑하기 위한 용도로 사들였다는 것이다.

소동은 8년전 홋카이도(北海道) 도청이 도내 일부 지역의 산림거래 실태를 도의회에 보고한데서 비롯됐다.

2009년 1년간 홋카이도내 스나가와(砂川)시와 란코시초(蘭越町)의 산림 400㏊가 외국법인에게 팔린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언론이 면적을 비교할 때 자주 쓰는 '여의도의 몇배' 처럼 일본인에게 익숙한 비유인 '도쿄돔' 87개에 해당하는 면적이었다.

2년후에는 외국 법인과 개인이 사들인 면적이 1천㏊를 넘어선 것으로 파악됐다. 매입자는 주로 중국과 싱가포르, 홍콩 등지에 있는 법인과 개인으로 밝혀졌다.

외국법인이 자산가치도 없는 산림을 대거 사들이는 이유를 놓고 온갖 추측과 해석이 제기됐다.

마침 인터넷에 "일본의 수자원을 노린 것"이라는 글이 올라오자 소문이 순식간에 확산했다.

인구가 계속늘고 있는 중국에서 장차 물부족이 우려되자 홋카이도의 풍부한 수자원 확보에 나선 것이라는게 줄거리였다.

일부 미디어가 이 소문을 기사로 다루자 소문은 삽시간에 사실 처럼 일본 전국에 퍼졌다.

일반의 관심이 높아지자 당국도 대처에 나섰다.

홋카이도 도청은 외국자본으로부터 수자원을 지키기 위해 도내 59개 시초손(市町村)의 176개 지역을 수자원 "보전지역"으로 지정하고 해당지역의 산림을 매매할 때는 3개월전에 이용목적 등을 신고하도록 의무화하는 조례를 제정했다. 홋카이도의 이런 조치는 전국으로 확산해 각 지자체가 다투어 수자원보전 조례를 제정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로부터 8년. 홋카이도 도청의 조사에 따르면 작년 12월 말 현재 도내에 외국법인과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산림은 159건으로 파악됐다. 면적은 약 2천500㏊.

소유자수와 면적 모두 5년전에 비해 2배 이상으로 증가해 외국 자본의 산림매입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수자원 '보전지역'의 거래도 당연히 증가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작년 12월 시점에서 중국계 기업 등의 보전지역 인근 산림매입은 4건에 불과했다.

개정된 조례에 따라 제출한 이용목적도 4건 모두 수자원 확보와는 상관없는 '태양광발전 시설 건설과 자산보유 목적'이었다.

도청에 따르면 외국법인 소유의 산림이 수자원 관련 용도로 사용된 사례는 한건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한다.

수자원 확보 목적의 산림매입은 없었던 셈이다.

그럼 대체 무슨 목적이었을까. 힌트는 홋카이도의 조사결과에 들어 있었다.

외국법인 등이 매입한 산림의 70% 정도가 외국인에게 인기가 높은 리조트 지역인 '니세코 에리어'에 집중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니세코 에리어'는 란코시초와 니세코초, 구챤초(倶知安町) 일대에 조성이 추진되고 있는 "아시아 최고의 리조트 지역"이다. 등기부를 토대로 이지역 일대의 소유자와 거래 이력을 추적한 결과 외국자본 소유의 산림은 51개소, 소유자는 홍콩과 싱가포르, 타이 등 아시아 국가의 법인이 대부분이었다.

리조트 인근 교와초(共和町)의 외국법인 소유 산림을 찾아가 보았다. 인구 6천여명인 교화초는 전체 면적의 절반 정도가 삼림이다. 이곳에 5년여 전에 홍콩의 한 법인이 163㏊를 매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등기부 주소지를 찾아가 보니 접근 조차 어려운 첩첩산중이었다. 우거진 숲을 헤치고 들어가니 도로가 하나 있기는 했지만 제설작업을 하지 않는 곳이라 5월 초 까지는 들어갈 수 없는 지역이라는게 현지 주민들의 설명이었다.

교와초 담당자는 "도로에 면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가상승을 기대할 수 있는 곳도 아닌데 왜 샀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현지 부동산 업자들을 취재하자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

"오래된 일이라 잊어 버렸다"며 얼버무리던 초로의 한 부동산 업자가 털어 놓은 이유는 "지인들에게 자랑하기 위해서"라는게 당시 구입자인 홍콩법인 오너에게서 들은 이야기였다고 한다.

"아무도 사지 않아 평당 수십 엔(수백 원), 기껏해야 수백 엔(수천 원) 정도인 삼림이지만 유명 리조트인 니세코 에리어 부근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는 것 자체에 가치를 느낀 것 같다"는게 당시 거래를 중개한 업자의 설명이었다.

구챤초의 리조트 에리어에 몰려있는 외국계 부동산 회사들도 마찬가지 이야기였다. 외국계 부동산업체 대표로 호주인인 그랜트 미첼은 니세코 에리어의 부동산 매입자는 홍콩, 싱가포를 비롯한 아시아계 은행가나 의사, 변호사 등이라고 전했다.

별장지로 개발하거나 전매하려는 사람도 있지만 신분 과시용으로 소유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별장에 지인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거나 소유 부동산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산림이나 황무지도 경치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비싸게 팔린 사례도 있다.

미첼 사장은 자신의 회사가 평당 1천500 엔으로 평가한 땅을 홍콩의 부호가 5천 엔에 산 경우를 소개하면서 "외국 부유층은 감정으로 땅을 구입하기 때문에 가치는 사는 사람이 정하는 금액으로 결정된다. 일본의 평가액은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삿포로(札晃)시의 한 부동산 업자는 7-8년전 외국인이 불쑥 찾아와 지도에 선을 죽 그으면서 "이 부근을 1천만 엔(약 1억 원)에 사고 싶다"고 한 사례를 소개했다. 그에 따르면 이런 거래에는 뒤에 반드시 일본인 부동산 브로커가 있다.

다른 부동산 업자는 당시 브로커는 목장경영에 실패한 사람이 대부분이었다면서 지금은 종적을 감췄다고 말했다.

일본인 브로커의 감언이설에 속아 중국인 부호들이 비싼 값에 쓸모없는 산림을 사들인게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수자원을 노린게 아니라 외국인 부유층을 노린 부동산 브로커의 농간이 소동의 전말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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