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임수정 기자 = 지난 10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개막한 러시아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화려한 볼거리로 무장했음에도 정작 이야기가 허술한 탓에 공허한 뒷맛을 남긴다.

1천200페이지가 넘는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동명 소설을 세 시간짜리 뮤지컬 무대로 가져온 이 작품은 러시아 90년 전통의 오페라·뮤지컬 극장 '모스크바 오페레타 시어터'의 흥행작으로 관심을 모았다.

러시아 이외의 나라에서 라이선스(외국 작품 판권을 사서 국내에서 제작) 뮤지컬로 제작되는 건 한국 무대가 처음이란 점도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이 뮤지컬은 원작의 파편들을 기워 내놓은 듯한 엉성한 이야기 구조로 실망감을 안긴다.

뮤지컬은 러시아의 귀부인 '안나'가 안정적인 가정 대신 뒤늦게 찾아온 운명적인 사랑 '브론스키'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다.

그러나 뮤지컬은 정작 '안나'와 '브론스키'가 왜 그토록 모든 걸 버리고 사랑에 모든 걸 거는지, 또 2막에서는 그 열렬하던 사랑이 왜 갑자기 식어버렸는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원작에서 섬세하게 그린 19세기 말 러시아 귀족 사회의 결혼 생활과 병폐, '안나'가 욕망과 사회 규범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 진실한 사랑을 찾아 시골로 내려와서도 귀족 사회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 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탓이다.

중심 이야기와 감정이 엉성하게 축약된 탓에 이 뮤지컬은 원작의 명성에도 불구, 언뜻 진부한 불륜극처럼 비치기도 한다.

원작에서 '안나'와 대조되는 삶을 사는 '레빈'의 이야기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다뤄진다. 소박한 노동과 현실 속에서 기쁨을 택하는 '레빈'의 삶은 '안나'의 불행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지 못하고, 그저 농기구를 들고 춤을 추는 모습 정도로 생략돼버린다.

톨스토이의 소설을 원작으로 했음에도, 번역 때문인지 대사들이 상당히 직선적으로 쓰인 점도 작품의 매력을 반감시킨다.

다만, 이 뮤지컬은 '러시아다운' 볼거리로 관객들에게 시각적 포만감을 안기는 데에는 성공한다.

막이 오르면 실제 무대 위를 얼음판처럼 사용하는 스케이트장 장면, 러시아 귀족들의 화려한 무도회, 눈보라 치는 러시아 전경 등이 연달아 펼쳐진다.

초대형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을 장착한 무대 구조물, 적극적으로 사용된 조명, 200여 벌에 달하는 고풍스럽고 우아한 의상들도 관객들의 눈을 즐겁게 한다.

'당신 내 곁에 없다면', '눈보라' 등 몇몇 넘버(노래)의 선율도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뮤지컬계 디바로 꼽히는 옥주현, 정선아가 안정적으로 넘버를 소화한다.

무엇보다 당대 유명 가수 패티가 부르는 '오, 나의 사랑하는 이여'를 들으며 '안나'가 자살을 결심하는 장면은 작품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명장면으로 꼽을 만하다.

사랑에 대한 집착과 강박, 허무로 피폐해가는 '안나'와 "내 사랑 그대여 죽음 같은 사랑"을 외치는 노래의 아름다움은 극적으로 대비를 이루며 관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장면을 선사한다.

공연은 2월 25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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