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연합뉴스) 김현태 기자 = 출전 선수 모두 등번호 36번. 이름 없이 36번만 새겨진 유니폼을 입은 삼성 라이온즈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뛰어나갑니다.

2017년 10월 3일 오후 5시 한국 프로야구의 전설이 된 이승엽의 은퇴경기는 시작됐습니다.

1회초 1루수로 그라운드에 나온 이승엽은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합니다. 상대 팀 넥센 히어로즈의 선두타자 이정후, 서건창, 김태완은 안타 없이 3자 범퇴로 물러났습니다.

1회말 삼성의 공격. 1번 타자 박해민이 안타 후 3루까지 진루한 상황. 3번 타자 이승엽이 타석에 서자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의 관중석에는 이승엽의 이름과 등번호 36번이 적힌 손수건이 물결칩니다.

첫 타석에 선 이승엽은 팬들에게 모자를 벗어 인사 후 넥센 선발투수 한현희의 투구를 응시합니다. 그의 보호장비에는 '삼성라이온즈에서 뛸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3구째 이승엽이 쥔 주황색 배트는 특유의 부드러운 스윙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궤적을 그립니다. 곧이어 터지는 관중들의 환호. 배트에 맞은 공은 환호를 타고 우측 담장을 넘어갑니다. 홈런왕은 이름에 걸맞게 은퇴경기 첫 타석을 2점 홈런으로 장식합니다.

3회말 투아웃 주자는 없는 상황. '가족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라고 쓴 보호장비를 찬 이승엽이 두 번째 타석에 들어섭니다. 야구장이 요동치듯 또다시 활화산에서 용암이 분출하듯 울려 퍼지는 관중들의 환호. 이승엽 자신도 예상 못 한 연타석 홈런, 어리둥절하던 이승엽은 1루를 지나 3루를 밟으면서 얼굴에 미소를 짓기 시작합니다.

묘한 긴장과 흥분이 그라운드를 넘어 관중석을 가득 채운 5회말. 이승엽이 세 번째 타석에 섭니다. 결과는 땅볼 아웃. 타석에서 물러나는 이승엽의 보호장구에는 '야구선수 이승엽이라 행복했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8회말 야구선수로 마지막 타석에 선 이승엽. 그는 평범한 내야 땅볼 타구 쳤으나 넥센 수비의 거친 송구로 1루까지 진출합니다. 아쉽게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승엽의 보호장구에 바뀐 문구 '팬 여러분 23년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로 그는 팬들에 그의 진심을 표현했습니다.

수비를 위해 9회초 그라운드로 나오던 홈런왕은 팬들에게 거듭 인사를 합니다. 넥센의 집요한 추격에 시종 긴장하던 이승엽의 얼굴에는 10:9 삼성의 승리로 끝나자 웃음꽃이 터집니다.

2017년 10월 3일 8시 23분께, `국민타자' `라이언킹' `홈런왕' 수많은 수식어.... 야구 영웅 이승엽의 마지막 그라운드는 끝났습니다.

다소 무뚝뚝한 홈런왕은 경기 후 이어진 은퇴식에서 많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 명성에 걸맞은 후회 없는 은퇴경기였지만, 모든 마지막이 그렇듯 아련함이 짙고도 길게 남겨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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